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 통신사 (문단 편집) === 일본 우익계의 '조공사절' 주장 === >朝鮮通信使とは、室町時代から江戸時代にかけて李氏朝鮮から日本へ派遣された外交使節団である。正式名称を朝鮮聘礼使と言う。'''その名の通り江戸幕府はこれを事実上の朝貢使節として扱っていた。''' >조선통신사는 무로마치시대에서 에도시대에 걸쳐 [[이씨조선]]으로부터 일본에 파견된 외교사절단이다. __정식명칭을__ 조선빙례사__라고도 부른다__. '''그 이름대로 에도막부는 이것을 __사실상__의 __조공사절로서 취급__했다.'''\ >---- > [[일본어 위키백과]] 「朝鮮通信使(조선통신사)」의 설명[* 현재 조공사절이라는 서술은 수정되었다.] 일본 극우 및 국수주의 역사학계에서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사절을 파견한 반면 일본에서 조선으로 파견하지는 않았으니 조선이 일본에게 조공을 했다"고 주장하며, 이를 교과서나 서적에서 그대로 차용한 탓에 '''조선이 굴욕적인 조공외교를 했다는 설이 일본 국내에서는 팽배해 있다.''' 특히 일본 인터넷에서 조선 통신사에 대해 검색해 보면 열 중 아홉은 이렇게 설명하며, 역사 분야의 [[혐한]] 소재로까지 쓰이는 주제이다. 그러나 실제 조공의 경우 천자국도 칙사를 제후국에 보내기 때문에 전제부터 틀렸다. 그리고 조선은 에도에 보내는데 일본이 한양에 안 보낸 이유를 따져보면, [[무로마치 시대]] 일본도 한양까지 외교 사절을 파견하기는 했으며 따라서 조선 전기까지는 한양에 동평관이라는 일본 사신 전용 숙소가 있었다. 그런데 일본 사신들이 왕래했던 길이 임진왜란 때 그대로 침공로가 되는 바람에 조선 조정은 안보 차원에서 일본인이 동래의 [[왜관]]과 그 주변 일정 반경을 벗어나는 것을 엄금하게 되었고[* 정해진 규정을 어기고 왜관 주변을 벗어나는 것을 난출(闌出)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자주 일어나는 바람에 조선 조정의 골치를 썩이기도 했다. 심지어 일본인들이 조선 조정에 강력히 요구할 일이 있을 때 일부러 난출을 감행하여 관심을 끌었다는 연구도 있는데, 오늘날에도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의 건장한 외국인이 무기를 들고 시청 앞까지 쳐들어간다면 신문 1면에 실리게 된다.], 그는 일본 사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즉 오늘날로 치면 대한민국이 일본에 파견하는 외교관은 총리를 만나고 돌아오는 반면 일본 외교관은 부산광역시장하고만 이야기하다 오는 것으로, 일본의 사절보다 조선의 통신사가 훨씬 격이 높았던 셈이다. 또한 통신사를 구경할 땐 싸움이 일체 금지되거나, 2층이나 다리에서 칭견하면 안되고 삿대질을 금하는 등, 예의범절이 정해져 있었다. 통신사보다 일본 사절이 파견된 횟수가 훨씬 많았으며, 그러다 보니 일본에 대한 조선의 지식이 늘 한 박자 늦었다는 연구도 있다.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7/30/2007073001287.html|#]] 당장 당시 동양 국가간 관계에 대해 무지했던 서양인들도 운좋게 조선통신사와 일정이 겹쳐 구경할 기회가 있었던 사람들은 "일본쪽에선 조선에서 항복 사절을 보낸 것이라 말하나 그런것 같지 않다"고 기록했을 만큼 뻔히 보였던 내수용 구라였다. 당장 일본측에서도 '''1870년대의 정치 싸움 기록에서 조슈번 공직자 본인들이 과격한 지방 정한론자들 욕하면서 옛날에 막부가 내수용으로 쳤던 구라를 지방 촌놈들이 문자 그대로 믿고 상황판단도 못하고 남의 나라랑 전쟁하자고 거품물고 있다'''고 욕했을 만큼 뻔한 내수용 뻥이란거 알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